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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1

스물세살의 수채화 29. 겨울 사람 마치 겨울의 한 끝에 서서 도시의 찬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정두 씨는 신문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직행버스 터미널 입구에 서 있었다. 자색 잠바에 동일한 색의 바지로 그의 얼굴을 보완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빛은 자색 잠바 보다도 진한 자색이었다. 특히 뺨에서부터 목까지는 한층 진한 자색 얼룩이 피부를 팽팽히 잡아 다니고 있었다. 청산면으로 가는 고속도로 둔덕에는 아직 덜녹은 눈들이 보이고 마른풀 위로 따뜻한 햇볕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저쯤일까? 단발머리 소녀 때. 어쩌다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들을 세어보며 한 낮의 햇볕이 기울어가는 양을 지켜보던 곳이? 이젠 한사람의 사회인으로 굳어버렸지만 이곳을 지날 때면 그때의 꿈과 이상이 떠올라서 가슴이 따스.. 2022. 9. 6.
스물세살의 수채화 28. 탄생과 전매청 용인 아저씨가 간 밤에 무릎까지 빠지도록 쌓인 눈을 쓸고 있다. 선생님은 서울에서 아직 안 내려오셨고 영숙이는 사무실 청소를 마치고 창문 앞에서 용인 아저씨가 눈 쓰는 것을 구경했다. 겨우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을 내었을 때 눈만 내놓고는 모자까지 푹 뒤집어쓴 사람이 면사무소 문을 지나 곧바로 보건지소를 향해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여기 안양 있지유?" 보건지소 현관 앞에서 모자를 벗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아저씨를 보고 안양이 반가운 소리를 한다. "아니, 웬일이세요?" "안녕하세요?" "그래, 신양은 잘 있어요?" "아, 예, 실은 아기 낳았어유." "아기 낳았어요? 딸? 아들?" "아들이에유." "아유 잘됐네요. 이제 아들 낳고 소원 성취했으니 좋.. 2022. 9. 5.
스물세살의 수채화 27.눈이 주는 행복 창 밖으로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쌓였다. 면사무소로 사람들이 등을 바짝 조여 안은 체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가끔 시야를 잠식할 뿐. 모든 것은 하얗게 반짝이는 색으로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눈이 그친 뒤의 그 고요함. 햇볕이 내리쬐는듯한 그 맑음.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곧 사그라져 버릴지라도 눈을 그 참모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눈의 예찬" 갑자기 눈을 예찬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밟으면 뽀드득 소리 나는 저 눈처럼 내 마음은 반짝이지도 맑게 개어 있지도 아니하고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눈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내린 눈을 본다는 것은 쓸쓸하다고나 할까? 소슬하다고나 할까? 면사무소 벽.. 2022. 9. 4.
스물세살의 수채화 26. 친구 ♣ 순진컨셉 영숙은 이즈음 간간히 통증이 오는 오른쪽 가슴과 한두 번 나오는 기침에 왠지 모를 불안을 느낀다. 불안.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얀 밤톨 속의 하얀 벌레처럼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파먹고 있는 벌레. 바람 한가운데서 영숙은 바람이 더 세게 부는 소리를 듣는다. 영숙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불과 몇시간 전 수경이에게 한턱냈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집에서나 미장원에서 머리 할 때나 아는 아저씨를 만나 몇 잔의 술잔을 홀짝이고 나이트에서 춤을 출 때에도 수경이는 자신의 순진을 자부했고 실제로 순진해 보였다. 순진해 보이는 것이 특기인 순진파 형 아가씨. 수경이가 영숙이를 두려워하는 것을.. 2022.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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