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돌이의 결혼생활 ~ 2. 부부란?>
빌 클린턴 대통령이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차를 타고 주유소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주유소 사장이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대학교때 사귀었던 남자 친구였다.
빌 클린턴이말하길
"저 친구와 결혼 했더라면 주유소 사장 부인이 됐겠네."
"아니요. 저사람이 대통령이 됐을거여요"
빌 클린턴
윌리암 클린톤·빌 클린톤,(1946년 ~ 2021)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한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다.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냉전이 끝난 시대에 대통령이 되었고, 첫 번째 베이비 붐 세대 대통령이었다.
미국 대통령 재임시절 유능한 경제정책으로 3000만개 일자리를 창출했고 3500억 달러의 국가부채도 갚으며 그외의 분야에도 유능하여 대통령 재직 시절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초기 생애
아칸소주 호프에서 태어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은 5번째 세대의 아칸소주민이었다.
그의 모친 버지니아 켈리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그의 부친의 이름을 따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로 이름을 지었다. 모친이 간호원으로서 훈련받는 동안 빌이 4세 때 그녀는 그를 그녀의 부모와 함께 두었다.
빌이 8세가 될 때 그의 모친은 로저 클린턴에게 결혼하였다.
가족은 핫스프링스로 이주하여 실내 수도가 없이 작은 집에서 살았다.
빌의 계부는 알콜 중독자였고, 가족 생활은 가정 폭력에 의하여 자주 혼란을 일으켰다.
그가 15세 때 빌은 자신의 계부에게 자신의 모친 혹은 이복 형을 절대 때리지 말라고 다시 경고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클린턴은 타임 잡지와 인터뷰에서 "그 일은 극적인 것이었다"고 상기하였다.
클린턴이 17세 때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결과로서 클린턴은 자신이 정치에서 경력을 원했던 것을 결정하였다.
그는 1964년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생으로서 그는 흑인 민권 운동 투쟁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헌신했다.
클린턴은 국제학에서 학위와 함께 196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을 지속하는 다음 2년을 보내는 데 자신을 허용한 로즈 장학금을 수상하였다.
1970년 그는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클린턴은 아칸소주 파예트빌에서 변호사로서 개인 실습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한 아칸소 로스쿨에서 강의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아칸소 정치
1974년 클린턴은 자신의 10대 시절 이래 자신이 원했던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의회를 위하여 나갔으나 매우 가까운 투표에서 선거를 패하였다.
1975년 10월 11일 클린턴은 예일 로스쿨에서 만났던 동료 법학생 힐러리 로덤에게 결혼하였다.
1976년 그는 아칸소주의 법무장관으로 선출되어 1977년부터 1979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978년 클린턴은 아칸소주지사의 직위를 위하여 나갔다. 그의 선거는 그를 그 주에서 최연소 주지사로 만들었다. 그는 투표의 55 퍼센트를 받아 다시 한번 아칸소주지사가 되었다.
42대 대통령 (1993 ~ 2001)
1993년 1월 20일 취임식을 올린 클린턴은 대통령 직에서 경제적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일하였으며 클린턴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로 두번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기러기 아빠가 유행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고 아빠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뒷바라지 해주는 것.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유태인 다음으로 대단하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엄마가 호롱불 아래에서 삯바느질을 해서 배운 세대이고, 우리 세대는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 코스가 있었고 있는 집 자녀들은 그때부터 과외를 해서 입시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다.
전직 대통령 아들이 공부를 잘못하였던 덕분으로 중학교 갈 때 평준화가 되고 대통령 아들이 고등학교 갈 때에는 덕분에 고등학교도 평준화가 되는 바람에 중고교가 입시제도에서 벗어났다.
이후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제도가 생겨 났다.
기러기 아빠 ~
같이 근무하던 하선생님도 아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났었다.
남편이 원자력에 근무하던 하선생님의 이후 소식은 연락이 끊어져서 어떻게 됐는지 잘모른다.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하선생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남편은 어떤지.
기러기 아빠들의 소식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철희네 회사 사람 중에 하나는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는데 공부를 다 마칠 쯤에 부인이 한국에 들어오는 대신 이혼하자고 하여서 이혼 당하고 오랫동안 혼자 살던 기러기 아빠는 미쳐서 거리를 헤매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중. 고교, 대학까지 10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다.
한창 성장할 시기의 아이들은 엄마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베이비 붐 세대가 성장 할 시기에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도 모여 살 수 밖에 없었다.
영숙이의 형제자매 5명과 부모님에게서 사회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경쟁, 질투, 시기심, 위로, 다정함, 등등 .....
또돌이의 결혼은 축복이었고 천국이었으며 정말 좋은 부인은 만나서 아이를 낳았고 어느 순간까지는 정말 좋은 가족이었다.
자매들 사이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친정 엄마에게도 하고 또 자매들끼리 나누기도 한다.
형제는?
자신의 문제를 잘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떤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모른다.
좋은 부인을 만나서 아이들도 잘 교육시키고 별 문제없이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기 마련이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기회가 없다.
경제적인 것만 돌아보면 순영이는 아이들이 크고 나서도
'왜 경제활동을 안했는지'
궁금하다.
물론 경력 단절로 간호사가 될 수는 없다 해도 많은 군인가족 부인들이 미용실이나 음식점까지는 아니어도 여러가지 경제활동으로 가정 경제를 일으키는 걸로 알고 있다.
또 군인 사회에서는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친교 생활도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많은 정보도 얻게 되어 활동범위도 넓어진다.
일반 회사에서도 남편이 다니는 회사부인들과 봉사단체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면서 부동산 관련 정보로 재개발의 이익을 누린 사람도 알고 있다.
자야 엄마는 회사 사택에 사는 상사 부인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상사 부인이 입원했을 때 매일 병문안을 한 걸로 알고 있다.
또 상사 부인이 봉사단체를 만들었을 때에는 총무로 활동을 하였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안하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고 그러면서 차츰 차츰 인생이 짜부라드는 것이다.
또돌이는 그렇게 시간이 많은데
'무엇인가를 배울 생각'
을 왜 안했는지 궁금하다.
인생에서 기적 중에 기적은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노력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이 있을까?
자기 자신을 바꾸려면 그만큼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수고하고 애쓰지 않고 변화 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교장 선생님을 한 10년 쯤 한 다음 정년 퇴직을 하신 많은 교장선생님들이 퇴직을 하고 나서도 집에서 여전히 교장 선생님이다.
그때문에 황혼 이혼을 당하는 교장 선생님들을 주변에서 보았다.
또돌이는 퇴직을 한다음에도 여전히 부대장이었다.
이제는 퇴직을 했으니 평민인 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는 성장기와 사춘기 때 친정 아버지한테 배운 것이라고는 권위적인 남성상에 이기적인 모습 뿐이었고 가족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던 탓도 있다.
기러기 아빠로 혼자 오랫동안 생활하여서 대화하는 법을 잊어 버렸을까?
올케하고 한 집에 살면서도 대화없이 끝끝내 화합을 하지 못한 탓일까?.
◐ 모든 은혜는 베풀고 나누는 데 있는 거 같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시간이면 시간, 물질이면 물질, 마음이면 마음, 일손이면 일손을 나누는 것이 본인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남편도 나의 가진 재능, 시간, 물질. 마음, 사랑, 일손, 대화를 나누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닌가.
나누고 베풀지 않을 때 고이게 되고 썩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쁜 사람은
'나 뿐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였다..
오랫만에 청소를 했다.
자주 쓰는 물건도 있었지만
'우리 집에 이런 물건도 있었어?'
하는 물건도 있었다.
옷도 자주 입는 옷이 있는가 하면 사놓고 한번도 입지 않은 옷도 있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쓰임받을 때가 최고인듯.
쓰임받는 부부는 최고가 아닌가.
순영이가 순탄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는데 반해 영숙이의 결혼은?
여자와 명태는 사흘도리로 때려야 한다?
저기 어떤 여자가 남편한테 맞는지 비명소리를 지르는데 통쾌하네?
그 여자가 영숙이였다니 ...
아이가 백일이 되자, 마치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린 것 처럼 시어머니한테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맞았다.
2주에 한번씩 시댁에 가다가 여름 방학이 되어서 혼자 아이를 데리고 시댁에 가서 일주일 있다 오라고 해서 갔을 때였다.
큰집에 제사 지내러 가야 한다고 하였다.
어머니도 감정이 있는 어조로 말하였고 영숙이도 감정이 안 좋았었다.
"제사 지내면 밥이 나온대요. 떡이 나온대요."
"너는 니 동생 백일에 담요까지 사가지고 가면서 제사를 지내러 안간단 말이냐?"
시어머니가 아들한테 울면서 전화를 했고 집에 돌아오는 즉시로 그 아들한테 두드려 맞았다.
그렇게 두드려 맞고서 고소한다느니, 이혼한다느니 하다가 친정엄마가 복수하려면 이혼하면 안된다는 말에 참기로 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했나?
그 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하던지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댁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너는 표정이 왜 그러냐."
말은 안하면 되지만 아마도 표정까지 관리하지는 못한 것 같다.
시댁에만 가면 설사를 좔좔했었다..
의견 같은 건 절대로 내지 않았다.
시댁 행사로 어디를 가게되면 차안에서건 어디서건 무조건 잠을 잤다.
무슨 말을 하던지 잠자는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법.
예수를 믿고 나서 시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하라고 해서 기도를 했다.
기도하면서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존경이나 사랑까지는 할 수 없었다.
중매 결혼에 시부모 때문에 그렇게나 맞고 남편은 몰라도 시부모까지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은 ~ 아직 영숙이가 예수님 가까이 나아가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시부모님한테 재산은 1원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1원도 받지 않았다.
요즘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를 면회 갈 때면 정말 불쌍한 마음이 든다.
시어머니는 완전한 치매이신대다가 얼마 전에는 대상 포진에 걸리셔서 가슴 전체가 화상입은 것처럼 벌겋게 되어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잘 치료가 되어서 흔적만 남았다.
영숙이의 결혼 생활은 중매와 지옥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평화로 정착되었다.
다 예수님의 은혜다.
예수 믿고 나서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영숙이 자신이 변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순영이는 연애 결혼에 아름다운 청춘들이 서로 진실되게 사랑하는 천국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이
"나 뿐인 생활"
로 천국에서 멀어진 것 같다.
변호사를 사서 이혼해야 하는 걸 보면 ◑.
'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 > 부부탐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박 ~ 꽥꽥꽥 (0) | 2022.05.17 |
---|---|
편견의 장벽을 넘어 (0) | 2022.05.15 |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0) | 2022.05.10 |
또돌이의 결혼생활 ~ 1. 사랑은 영원할까? (0) | 2022.05.03 |
사랑1 ~ 나무 위키에서 (0) | 2022.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