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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

하숙생

by 영숙이 202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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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     

 신혼 때 시아버지가 매주 시댁을 오라고 해서 시댁을 가서 큰절을 하고 앉아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너네 친정 하숙 쳐서 먹고 살아다며? 내가 가서 다 물어보고 알아봤다."   

 

 영숙이는 깜짝 놀랐다. '하숙을 쳐서 먹고 살다니'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청주 시청에 근무하셨고 영숙이는 고등학교 교련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정이 '하숙을 쳐서 먹고 살았다'는 표현은 영숙이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하숙을 하시기는 하였지만 하숙만 해서 먹고 살지는 않았는데 시아버님이 그렇게 비하해서 말하는데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영숙이가 고등학교를 충남여고로 진학하면서 대전에 아버지가 사놓은 집으로 엄마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 비어있던 이층으로 이사를 들어왔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이사하지 말라는 데도 이사했다고 몇달 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돈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엄마는 생활비가 없어서 먼산 바라기를 하면서 한숨을 내쉬는데 바로 옆동네에 살던 큰이모는 이모부가 대전 시청에 다니시면서 형편이 그렇게 넉넉한데도 돈을 절대로 빌려 주지 않았다.

 텔레비젼이 있어서 우리가 놀러가면 텔레비젼을 보는 것도 못마땅해서 싫어하시던 인색한 분이셨다. 그런 큰이모한테 엄마가 참기름을 짜서 팔러 가니까 두병의 참기름을 두고 가라고 하였다. 그때 영숙이도 엄마랑 같이 이모네 집에 갔었는데 이모가 큰방으로 들어가서 지갑을 열더니 '지금 돈이 없네. 나중에 줄께' 그러면서 외상으로 ~ 참으로 인색한 분이셨다.

 

 엄마는 아래층에 혼자 사시는 아주머니때문에 바람둥이 아버지가 자주 이집에 들락거렸다고 오해(?) 아님 팩트(?) 때문에 큰 딸인 나한테 그 사실을 말하면서 몇달이 지나서 결국 아래층으로 이사를 하였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어두운 안방에서 길게 누워 기와집을 짓는다던 엄마는 어느 때 부터인가 축구공을 꼬매더니 어느날 부터인가 하숙생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하숙생.

 이층 큰방과 작은 방에 하숙을 들이다가 이층이 월세로 나가면서 아래층 문간방에 하숙생이 들어오고 나중에는 큰방만 우리가 쓰고 남은 방에 하숙생을 들이기도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보은 군청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보은에서 하숙을 하고 계셨다. 

 

 여고생 시절 그리고 대학생 때에도 하숙생이 있었다.

 하숙생에 대한 감정은 그냥 하숙생으로 살다가 떠나면 그만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숙비를 내고 잠시 우리 집에 머물면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다가 기한이 되면 떠나는 사람들. 

 그렇게 지나간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물론 게중에는 따로 밖에서 데이트를 한번인가? 두번인가? 했던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친해져서 감정을 나누기 전에 떠나갔기 때문에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는 사이도 되지 못했었다.   

 그런 감정에 영숙이가 둔감할 수도 있었고 평생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서 싫어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엄마 쪽을 닮아서 그런 감정을 잘 모를 수도 있었다.

 

 하숙생들을 집안에서 또는 복도에서 마주치기는 하였지만 마주쳤다고 어떤 감정이 생기거나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 는 없었다.   

 연애 감정이 생길리 만무.

 참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도 있었고 여고생도 있었고 충남대 공대생에 의대생. 군인 아저씨. 일본에서 유학 온 학생. 형사 등등등   

 

 그럼 엄마가 하숙을 해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을까?

 

 아버지는 엄마가 돈을 번다는 이유로 생활비를 덜 주셨을 것이고 엄마는 알들 살뜰 모아서 몫돈이 되면 아버지를 주셨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침마다 하숙생에게 부쳐주는 달걀 후라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엄마한테 우리도 달걀 좀 부쳐 달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정말 단 한번도 달걀 후라이를 부쳐준 적이 없다.

 너무 화가 나서 영숙이는 엄마가 아침 상 차리는걸 도와 드리면서 막말을 했었다.

 

 "엄마. 우리도 달걀 후라이 한번만 해주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정말 단 한번도 안해주네. 하숙생들만 해주고, 그렇게 하숙생들만 위하는데 평생 하숙이나 하라구."   

 엄마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정말 아끼고 아껴서 돈을 쓰지 않았는데 그럼 그돈으로 무얼 했을까나.

  그냥 아버지에게 건너갔다.

  아버지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전 시내 어딘가에 부동산을 사고 옥천 어딘가에 산을 사고 그랬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한일은 자녀들 학비를 대주는 것뿐이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사준 간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취직을 못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영숙이를 보건지소에 임시직으로 데리고 가는 날 아버지가 버스 정류장에 있던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사먹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가 너도 먹겠느냐고 말했지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었다.

 

 '아버지는 아이스크림도 먹을 줄 아는구나. 우리는 한번도 못먹어 봤는데.'   

 

 엄마가 하숙을 해서 우리가 받은 혜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돈 쓰는게 좀 편했을려나? 물론 우리가 엄마의 알뜰살뜰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정신적인 유산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알뜰살뜰 무조건 아끼는 것도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느라 바쁘셨겠지만 베풀줄 아셨으면 좋았을텐데, 자녀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다른 이를 위해서도 베푸실줄 아셨으면 좋았을텐데, 아버지는 자신외에는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인색하셨고, 엄마는 자신에게 조차 그리고 함께 사는 자녀들이나 조카들에게도 인색하셨고, 우리들이 준 돈을 정말 십원 한장도 안쓰고 모아 놨다가 찾아와서 징징거리는 자녀들 누군가에게 주었다.

 30년전.

 엄마가 50대였을 때.

 형제자매들 모두가 객지에서 돈을 벌고 생활비를 엄마에게 보내어서 엄마가 경제적인 사정이 넉넉해졌을 때 한달에 150만원씩 저축한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일찍 아이들을 낳고 다 키워서 아직 젊었었던 50대의 엄마는 베드민턴을 치러 다닌다고 하였었다.
 어느날 엄마한테 전화를 했을 때 말했었다.

 "엄마. 봉사하러 다니면 어때? "
 "봉사는 내가 무슨 봉사를 다녀?"   

 

 엄마는 화를 내며 말 했었다.  
 삶의 균형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균형을 잡도록 애를 써야 한다. 

 

 하숙생.

 그때 그시절 하숙생 이야기는 그렇게 "라때"는 말이야로 끝난다. 지금 이렇게 티스로리 한쪽을 쓰는데도 쓸 이야기가 다 체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도 어느 날엔가는 분명 끝날 것이고 우리의 이야기도 이렇게 한쪽도 못채울 분량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서 사는 거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긍정적이고 최선을 다한 이야기로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살아야 한다.

 남은 분량을 대신 다른 이야기로 체워야겠다.

 

 

 친정이 서대전역 근처인데 76세로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가 70세로 아직 활동 하실때인 20년 전에 친정아버지가 아파트 관리인으로 계셨던 서대전 역 근처 장미 아파트가 그때 돈 500만원만 주면 전세를 안고 살 수 있었다.

 영숙이와 큰 조카가 사고 싶다고 말했지만 친정 엄마는 그걸 뭐할려고 사느냐고 말렸었다.

 지금 살고 계시는 아파트 앞에 주공아파트는 5000만원이었는데 샀으면 좋겠다고 하니 말렸다.

 

 이유는 '왜, 엄마가 살고 있는 집근처에 사느냐' 는 것이었고 '속시끄러우니까' 엄마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는 절대로 사지 말라는 것이었다. 멀리 멀리 떨어진데를 사라고 하였다.

 엄마를 찾아서, 엄마한테 자주 가니까 근처 부동산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고 투자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돈을 보태주거나 사주는 것도 아니면서 말렸었던 것이다.

 

 살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가족이라도 필요할 때 뿐만 아니라 항상 곁에 붙여주고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마음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하지는 않겠지만 함께 해서 얻을 수 있은 유익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의 그릇은 거기까지이셨던 것이다. 

 

 얼마 전에 알아보니 재개발 때문에 장미 아파트 거래가격은 2억 2천이고 집앞에 있던 주공아파트는 개발되어서 현재 쌍용 아파트로 6억에 거래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카이스트에 거액을 희사하신 분이 말하셨다. '아직도 찾아보면 먹을게 있다고.'

 투기가 아니라 투자를 하고 이익이 있다면 좋은 일에 쓰고 ~~~

 

 친정 엄마의 그릇 크기가 그렇더라도 우리들을 위해서 신령과 진정을 다해 기도하시는 이제 85세의 친정엄마가 언제나 건강하시고 또 여전히 열심히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것에 대하여 항상 감사드린다.   

 

 그렇게 기도하심으로 본인도 건강하시고 또 우리도 하나님의 역사와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음에 무한 감사드린다. .

 

 이번 달에는 코로나 확장세 때문에 친정 엄마에게 가지 못하였다. 속히 코로나가 가라앉아 다음 달에는 다녀올 수 있으면. 언제까지고 코로나가 강성하여 힘들게 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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