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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어떤 나라일까?>
출처 : 위키백과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의 국가이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 해,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서쪽으로는 루마니아, 몰도바와 접한다.
키예프가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이다.
동유럽 평원과 이어져 있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법적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인구의 절반(주로 동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 오데사 지역)이 러시아어 사용자이며 일반적으로 학교/회사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두 언어 모두 사용하고 있으며 사실상 러시아어가 제2의 공용어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키예프,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리비우, 오데사, 자포리자가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함에 따라 행정력이 크림반도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개요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대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튀르크족·몽골족 등의 오랜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까지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부분이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제하에 놓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합병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의 적용을 받았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군사력 운영의 질적 수준은 아직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중간이다.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산업으로는 석탄·철광·선철의 생산에 있어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풍부한 수력전기를 이용하여 기계제조공업·화학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의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제조업, 화학공업의 중심은 돈바스·드네프르 주이며, 드네프르강의 하구에서 키이우까지의 사이에는 6개소의 수력발전소가 단계상(段階狀)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옥수수·보리·사탕무·해바라기·포도의 재배, 가축사양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난한 크림반도 남단과 광천(鑛泉)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중요한 관광·보양지이다.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타라스 부리바〉의 배경이 되기로도 알려졌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 및 러시아어가 쓰이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이다.
자연 환경
지리
국토 면적 603,700km²에 576,700km²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제외시) 해안선 길이는 2,782km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44번째로 큰 국가(중앙아프리카 공화국보다는 작고, 마다가스카르보다는 크다.)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중심이 우크라이나 서쪽의 라키브 마을 인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의 지리적 중심을 보는 관점에 대해 논쟁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평원, 스텝, 고원이 있으며, 그들을 지나가는 강이 흑해로 흘러들어간다.
거의 남쪽 만으로 강이 빠져나가고 남동부 지방에는 다뉴브 삼각지가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산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베를라 산으로 높이는 2,061m이다.
크림 반도를 따라서 넓은 해안선이 펼쳐진다.
우크라이나에 분포하고 있는 초르노젬(흑토) 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아스팔트, 무연탄, 철, 망가니즈, 크롬, 타이타늄, 납, 아연, 알루미늄, 수은, 니켈, 천연 가스, 석유 등 70여 가지의 종류에 달하는 천연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기후
대개 온화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데 남쪽의 크림 반도 인근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비는 북서부 지방에 가장 많이 내리고 동부와 남동부 지역은 덜 오는 편이다.
겨울은 흑해 인근 지방이라면 따뜻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대체로 추워진다.
여름에는 전반적으로 따뜻하지만 남쪽 지방은 무덥다.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입니다.
우크라이나 역사에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건너와 동유럽을 정복한 튀르크 민족들의 관계를 빼 놓을 수 없다.
3세기부터 시작한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의 유럽 침공과 동슬라브족 정복 그리고 이주는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바르 카간국에 이어 아바르 카간국 그리고 하자르 카간국까지 이어진다.
동유럽 동슬라브 원주민들은 사바르 카간국에 정복당해 프랑크족들과 대립하기도 하였고 하자르 카간국의 우크라이나 초원 정복으로 인해 동슬라브 문화는 서유럽의 문화와는 조금 이질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고대 투르크어인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인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인들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키예프 대공국은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62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한 루스인들이 페르시아 사서와 동, 서 로마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에 원초연대기의 기록에서는 루스인들의 카간으로 알려진 류리크가 동슬라브족 지역에 정착하면서 류리크 왕조와 키예프 대공국이 나타나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크냐지 또는 벨리키 크냐지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된다.
동슬라브인들은 튀르크계 카간국인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오랫동안 있었다.
루스인들의 첫 국가인 루스 카간국이 키예프 대공국으로 발전하였고 그 남쪽이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이다.
이 중세 국가의 수도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였다.
키예프 대공국은 현재의 북게르만족 계통의 루스인들이 세웠다고 하나 동유럽 학자들은 이에 부정적이다.
루스인들은 강력한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그리하여 10세기와 11세기에는 키예프 루스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Galicia, Halych)와 볼히니아(Volhynia, Volodymyr-Volynskii)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으로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정복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카자크 수장국이 세워져 백년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압력을 견뎠으나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 1920년에는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1932년~1933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를 침공,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독일군과 추축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적군을 쳐부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 여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하였다.
마을 전체를 태워 없애기도 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처럼 포악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여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끔찍한 시기였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고(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매우 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의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러시아 차르국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할양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 간의 분쟁 소지가 된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의 혼란 속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기는 스텝 지방의 금빛 밀밭 위 푸른 하늘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청색과 황색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전통적으로 깃발에 많이 쓰던 색이다.
2005년 1월에 빅토르 유시첸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우크라이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였다.
율리아 티모셴코는 2, 3차례나 총리로 선출되었다.
2010년 2월 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실시 되었을 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율리아 티모셴코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 7월 4일에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러시아어를 지역공용어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하고 준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러시아어를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2012년 8월 8일에 야누코비치가 동남부에서 러시아어를 공식언어로 하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러시아어는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공식언어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총선을 치른지 2주만인 2012년 11월 11일에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우크라이나는 2013년에 EU와의 협정이 무산되자 친EU시위가 발생되었고, 시위진압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되었다.
2013년 12월 8일에는 반정부 시위대에 의해 레닌상이 철거되었다.
유로마이단 시위가 발생한 결과, 친러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망하였다.
이로 인해서 친러 성향이 강했던 크림 반도의 크림 자치 공화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선언과 함께 러시아로의 편입을 추진하였으며, 그 후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를 실시하였고 마침내 2014년 3월 18일에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 합병 조약에 체결되었다.
유럽연합과 미국 등 서방 세계는 이 합병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러시아에 제재를 가했다.
또한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주는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를 주장하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인정하지 않으며,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를 비롯한 동부 지방에 대해선 강력한 군사적 행동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연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경계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에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일어났다.
정치
![](https://blog.kakaocdn.net/dn/yL6QC/btruuhyAHfC/KFAZqWvypbRTqldMMLmz5k/img.jpg)
우크라이나는 입법, 사법, 행정 등 3권이 분리된 의회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통령은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 중임제인데, 1번의 중임이 가능해 최대 임기는 10년이다.
대통령이 총리와 내각을 지명하는데,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야당이 의회가 절대다수일 경우 총리가 대신 권력을 독점한다.
의회
국회(최고회의)구성
- 국민의 일꾼 254석, 43.16%
- 인생을 위한 야권연단 43석, 13.05%
- 전우크라이나 연합 "조국" 26석, 8.18%
- 유럽연대 25석, 8.10%
- 목소리 20석, 5.82%
대통령
우크라이나는 금융위기와 정국불안으로 2010년 1월 17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승리했는데, 과반 득표가 나오지 않자, 같은 해 2월 7일 결선 투표를 통해,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승리를 확정하였다.
율리아 티모셴코는 패배를 맞이하였다.
이로써, 오렌지 혁명의 과정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014년 대선에서 페트로 포로셴코가 승리하여 대통령이 취임했으며, 2019년 선거에서 전직 대통령인 페트로 포로셴코를 이기고 희극인, 배우 출신의 정치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정식 대통령이 되었다.
행정 구역
우크라이나는 24개 주와 1개 자치 공화국, 주와 같은 지위를 갖는 2개 특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은 2014년 이후부터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 상태에 있다.
- 자치 공화국
- 크림 자치 공화국
- 특별시
- 키예프 (Kyiv)
- 세바스토폴
대외 관계
유즈노예 로켓엔진 설계업체는 액체부분 세계 최고 로켓 엔진 설계 업체이다.
소련 시절 전략 로켓군의 지상 발사 전략 탄도탄은 모두 여기서 설계되었다.
2022년 러시아와 전쟁 중에 있다.
경제
우크라이나의 경제 규모는 독립국가연합 국가 중 2위이다.
하지만, 정치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경제도 불안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유럽 연합이나 러시아, 미국 등에 의존하고 있다.
밀의 총생산량은 22,323,600톤(2011년, 세계11위)이다.
<사회>
주민
2001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 비율은 우크라이나인이 77.8%, 러시아인이 17.3%이다.
약 12,000명의 고려인이 거주하며, 벨라루스인 역시 거주한다.
종교는 대부분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믿는 기독교인이며 가톨릭교회이지만, 동방정교회 전례 즉, 예배방식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와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온 개신교가 있다.
2001년 국제조사에 따른 모어분포를 보면 67.5%가 '법적' 공용어인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어를, 29.6%가 '실제적' 공식어인 러시아어를 쓴다.
루마니아어·폴란드어·헝가리어 등 소수민족어도 쓰인다.
러시아어는 하르키우와 도네츠크, 루한스크 등의 동부, 오데사 등의 남부, 크림 반도 전역에서 주로 쓰이며, 동부와 남부의 지역 공식어로도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2014년 2월 23일에 최고 라다가 러시아어 등 소수민족어를 지역 공식어로 인정하는 법률을 다수결로 폐지하는 것을 결정하면서 지역공식어 지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2014년 5월 20일에 의회에서 다시 러시아어가 제2국어로 지정될 예정이다.
리비우 등 서부는 우크라이나어만 쓰인다.
수도 키이우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모두 쓰인다.
거의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이해한다.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는 둘 다 동슬라브어군에 속하지만 우크라이나어는 폴란드어나 체코어 등 서슬라브어와도 가까운 면이 있으며, 벨라루스어와의 문법도 유사하다.
벨라루스어도 약간은 사용되며, 북부 지방에서 주로 사용된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2006년부터 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 되었다.
사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문화
우크라이나 문화는 우크라이나 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혼인 생활 역시 전통에 따르는 경향이 있었으며, 서유럽에 비해 조부모가 아이들 양육에 있어 더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크라이나의 문화는 건축, 음악, 미술에서 반영되듯이 동/서 인접국들의 영향을 받았다.
소비에트 연방의 우크라이나 지배는 1932년 스탈린이 '문학과 미술 조직 재건'이라는 법령을 공표하면서, 소련 내 공산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서 우크라이나의 미술과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책은 사실상 독창성을 무참히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다.
1980년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 일어나면서, 소련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되찾는데 성공하게 된다.
건축 양식
키이우에 있는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건축 양식의 예로 들 수 있다.
'피산키'라고 불리는 부활절 달걀의 전설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래한다.
부활절 달걀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왁스(또는 촛농)로 그림을 그리며, 염색을 함으로써 달걀에 산뜻한 색을 불어넣으며, 염색은 그 전 왁스칠한 부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달걀이 완전히 염색된 후에는 왁스칠 한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색깔 패턴만 남게 된다.
이 전통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의 기독교 수용보다도 선행한다.
2000년에는 카르파티야 산맥 근처에 있는 코로먀라는 도시에 우크라이나 7대 불가사의로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상징으로 선별된 피산카 박물관이 세워졌다.
음식
우크라이나 전통음식은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생선, 버섯요리 등이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다량의 감자, 곡물, 신선하거나 절인 야채도 많이 섭취한다.
유명한 전통음식으로는 바례니키(밀가루 경단에 버섯, 감자, 독일식 양배추 김치, 신 치즈 또는 체리를 넣고 끓인 음식), 보르쉬(사탕무와 양배추와 버섯 또는 고기를 넣고 끓인 빨간 수프), 그리고 홀룹찌(양배추에 쌀, 당근, 고기를 채워넣고 말은 음식) 등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명물로서 키이우 치킨도 있다.
우크라이나 인들은 끓인 과일, 주스, 우유, 우락유(우크라이나인들은 우락유로 코타치 치즈를 만든다), 생수, 차와 커피, 맥주, 와인, 호릴카를 마신다.
국기
![](https://blog.kakaocdn.net/dn/b1362R/btruyObkckh/lFPT22tGUE04WpvKHgg4EK/img.png)
우크라이나의 국기는 밀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색과 노란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민 공화국 시절에는 문장이 들어간 국기를 사용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를 받은 시절에는 낫과 망치가 들어간 국기를 사용하였다.
국장
![](https://blog.kakaocdn.net/dn/b6GXfu/btruuhSTAso/WY2lckh6m5iktv86RiVB5K/img.png)
우크라이나의 국장은 일명 '트리주브'라고도 불리며,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키예프 대공국 시절부터 쓰여 왔으며, 문장에 총을 든 남자가 들어가 있기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를 받은 시절에는 낫과 망치가 들어간 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 동유럽을 다녀 온지가 벌써 7 ~ 8년이 되었다.
동유럽을 가게 된 동기는 동유럽에 계시는 선교사님에게 선교비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쪽지역으로 여행을 가보고 싶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로 여행갈까요?'
하고 기도했었고 선교비를 보내고 있었던 탓인지, 마음 속에 동부유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등 여러나라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녔지만 동유럽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들이었다.
여러가지가 낙후된 지역이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오래된 역사와 문화는 감동을 주었다.
루마니아인가?
하룻저녁을 작은 동네의 작은 모텔에서 지냈는데 저녁을 먹고 거리에 나가서 산책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펌프가 도로가에 있었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제도 속에서 보낸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마을에 있는 식당에 모여 있는 나이드신 사람들의 눈빛은 흐릿하게 촛점이 없었다.
물론 시골이라서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 도시로 나갔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치열함은 없었다.
건물들은 페인트가 벗겨져 오래 전의 영화만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새벽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비용이 저렴한 패키지를 선택했기 때문에 숙소가 일류가 아닌 지방에 있는 저렴한 모텔이어서 덕분에 동부유럽의 민낯을 만날 수 있었다.
허름한 아파트들은 저런 곳에 사람이 살까 싶을 정도로 허름했고 문을 닫은지 오래된 쇼핑몰도 보였다.
도시는 화려했다.
화려한 궁전,
아름다운 공원,
오래된 거리의 중후함.
도시의 거리 중심을 벗어나서 1시간만 달리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시골이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을 것 같은 곳도 세월이 지나면서 텅비고 한적해지고 ~
우리나라 시골도 이제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충분히 기도하고 기도해야 할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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