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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탐구 생활/편지글

롬이 엄마가 보낸 이메일 편지

by 영숙이 2021.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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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보낸 편지

                                                          2000. 6. 17

 방금 약수터엘 다녀와 이 글을 씁니다.
  

 약수터 뒷편,

 두 군데에 무더기를 이루며 피어있던 노랑붓꽃들이

 어느 사이 다 져버려

 꽃이 피어있던 흔적조차 없이

 무성한 줄기만 혹은 서 있고,

 혹은 땅바닥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고랑을 따라 이어진 고마리 덤불도

 제법 키가 크고 무성해져

 뒷산 오솔길 근처

 쇠뜨기 군락까지 침범했더군요.

 

 이제 장마철이 되면

 고마리가 자라난 고랑을 따라

 졸졸 물이 흘러내리리란 상상을 하며

 잠시 더위를 식혀보았습니다.
  

 산으로 이어지는

 왼쪽 경사면에는

 키 작은 잡초더미들 속에서

 보랏빛 꿀풀 무리가 한창 꽃을 피워올리고,

 하얀 개망초도 드문드문 서 있었습니다.
  

 찔레꽃이 한창이던 때에는

 산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눈 앞이 환해져

 마치 찔레꽃 덤불이

 하얗게 불을 밝혀들고

 맞이해 주는 것 같았는데...

 

 그 향기로운 흰꽃들도 다 져버리고,

 이제 숲 가장자리에 선 싸리나무 몇 그루가

 조용히 홍보랏빛 꽃불을

 하나씩 하나씩 피워올리고 있었습니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리 크지 않은 자귀나무들이 눈에 많이 뜨였습니다.

 

 숲은 항상 변함 없어 보이면서도

 사실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걸

 문득문득 깨닫곤 합니다.

 

 이제 여름이 깊어지면

 이 숲에서

 작은 깃털 부채같은

 자귀나무 꽃들을 많이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는

 비릿한 밤꽃 향기가 짙게 실려있고,

 고개 들어 키 큰 나무를 올려다 보니

 야생 버찌가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숲은 소리없이 번화(繁華)하고 웅성거려요.

 

 러시아워의 도심처럼.

 

 건너다 보이는 저 쪽 오솔길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어둡고 서늘하고 그윽해 보였습니다.

 

 신비로운 느낌으로

 그 길을 따라 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썼던 건데, 아이들이 컴퓨터를 점령하고 있어서 종이에다가 써놨던 것을 지금 옮겨 적었습니다.
             
                               2000. 6. 24. 롬이 엄마 올림

 

 

네 번째 편지

                                                           2000.06.26 14:10 


  한동안 세리 초등학교에서 도서실 전산화 작업 자원 봉사자로 일하느라 많이 바빴습니다.
  

 전산화 작업이 뭔가 궁금해서 응했는데, 그거 완전히 몸으로 떼우는 거더군요.

 

 이제 도서대장 다 기록해서 용역회사에 보내놓고 조금 한가하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다들 경험이 없어서 일에 두서가 없어 일의 진행이 효과적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리더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도서실을 맡은 선생님도, 리더 역할을 자청한 어머니도 경험 부족인지 리더로서의 역량 부족인지 일을 제대로 계획적으로 추진해 나가지를 못해 짜임새 있게 일의 진행이 되지를 않아서 그나마 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불만을 사고 있답니다.
  

 오늘도 오전에 학교에 다녀 왔습니다.

 

 제가 기획팀의 일원이거든요.

 

 용역회사에서 라벨이 만들어져 올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한가하지만 기획팀은 또 새로 구입할 책도 선정해야 하고 기타 앞으로 해 나갈 일에 대한 계획과 절차를 의논하느라 거의 매일 학교에 나가고 있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그만 기획팀에서 나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꼭 제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저 아닌 나머지 사람들로도 충분한데 괜히 나가 앉아 있어 봐야 시간 아까운 생각 밖에 들지가 않아요.

 

 이거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일은 많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은 부족한 실정인데 실제로는 남아돌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입니다.

 

 일의 추진이 효과적으로 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리더의 역량 부족이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나 다른 사람들이 지금의 리더만큼 해 나갈 수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모두 무경험자들이라 시행착오를 겪을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또 쓰겠습니다.
                     
                               2000. 6. 26 롬이 엄마 올림 

 

 

 

다섯번째 편지

                                                        2000.07.18 10:57 

  아침에 멍하니 바보상자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롬이가 한문 보충 교재를 안 가지고 갔다며 숨 넘어갈 듯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리는 방학이라며 늦잠을 즐기고 있었지요.

 

 애들은 가끔 준비물을 빼먹고 가선 갖다 달라고 전화를 한답니다.

 

 학교가 가까워서 방심하고 잘 잊어버려 안 좋은 건지, 학교가 가까우니 갖다주기 좋아 다행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습니다.  
  

 약속 시간까지 아직 많이 남아 방바닥에 신문을 펼쳐놓고 다시 멍하니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그 동안에 세리가 깨어나서는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머리 속에 아무 생각이 없어 약속 시간도 까먹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사서도우미 교육이 오후에 있으니 나오라는 전화였습니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책을 들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약간 투덜거리며.

 

 어쨌든 문을 나서면 이 곳은 온통 푸른 자연이라 귀찮은 생각도 일순간입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학교와 복지상가로 향하는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 발에 채여 구르는 돌이 너무 정겨워,

 애들도 언젠간 이 곳을 그리워 하게 되리라고,

 이 곳의 풍경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아로새겨져 어딜 가든 그리워질 것이리라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교문을 새로 세우느라 어수선한 학교 앞으로 폭포수처럼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하루가 서서히 달구어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낮은 학교 담 위에 책을 올려 놓고 학교 앞을 왔다갔다 하며,

 하늘도 올려다 보고 산도 보고 발 밑의 풀도 보며 잠시 기다리는 사이 수업이 끝났는지 건물 안에서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중앙 현관에서 두 아이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이 쪽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렇게 달려 나오는 짧은 사이 아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하고 빛나 보였는지...

 

 햇살은 아이들에게만 유독 맑고 신선한 빛을 내려보내는 듯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를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빛나 보이는지,

 얼마나 예쁜지...

 

 그 모습을 나이든 내가 얼마나 감동적으로 보고 있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 시절 내가 몰랐던 것처럼.
  

 아이를 기다리고 책을 전해준 짧은 사이,

 햇살은 더 달구어지고,

 나무는 더 푸르러져 그 그늘은 더 그윽하고 서늘해 보였습니다.

 

 

 

두 번째 편지

                                             2000.06.23 15:00 

 먼저 정중히,

 한 175도쯤 머리 숙여 사과를 드리옵니다.

 

 언젠가 두 번째 세 번째 편지를 받아 갈무리해 놓고 읽지도 못했는데,

 

 오늘 오랜만에 시간이 있어 편지함을 열어보니 벌써 네 번째 편지가 와 있네요.

 

 일단 전에 쓰다가 말았던 편지를 미완성인 채로나마 보내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바빴냐고요?

 

 그건 다음 편지에서 이어서 쓰겠습니다.

 

 즉, 다음 편에 계속...

 

 2000. 6. 5.

 

 파마하러 미장원에 갔다.

 

 북부 상가 2층 한 귀퉁이에 있는

 

 '환희' 미용실.

 

 키 크고 이쁘고 싸근싸근한 아가씨들이 있는 곳.

 

 "머리가 참 많이 길었네요. 정말 이쁘게 길렀네요. 그런데 자르시려구요? 아이 아까워라. 다들 머리 못길러서 야단인데..."

 

 호리낭창한 아가씨가 내 머리를 자꾸 쓰담아 내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마치 제 머리인 듯 아쉬워했다.

 

 전혀 망설임 한 오라기 없이 미용실 의자에 앉았던 나였건만 그 아가씨의 안타까움에 동조되어 내 거치적거리던 머리가 갑자기 이뻐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미련'

 

 이라는 단어가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그냥 자르지 말고 파마만 할까?

 

 아니야.

 

 그 동안 이 머리 때문에 얼마나 귀찮았던가.

 

 마음을 굳게 먹자.

 

 그리고 귀찮았던 그 때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키가 작아 긴 머리는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냥 잘라 주세요."

 

 그 호리낭창한 아가씨는 노란 고무줄로 내 머리카락을 몇 묶음으로 나누어 묶더니 조심스럽게 잘라내어 화장대 위에 놓았다.

 

 몇 번이나 머리카락이 이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마치 특별히 꽃을 이뻐하거나 동물을 이뻐하는 사람처럼 그 아가씨는 머리카락을 아주 소중하고 이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 아가씨가 다가와 잘라놓은 내 머리카락을 보더니

 

 "아이 징그러워라.  머리에 붙어있을 때는 예쁘다가도 잘라놓으면 난 머리카락이 그렇게 징그럽고 무섭더라."

 

 하며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그 곁에 있던 다른 아가씨 왈,

 

 "얘는 아마 잘 때도 머리카락을 벽에 걸어두고 잘 거야. 얼마나 머리카락을 애지중지 하는지. 난 첨 봤어."

 

 그러자 호리낭창한 아가씨,

 웃으면서

 

 "그 정도는 아니야. 벽에 걸어두다니."

 

 했다.
 어쨌든 그 아가씨는 천생 미용사인가 보다.

 머리카락을 그렇게 이뻐하니 미용일이 행복하겠다 싶다

 

 

 

추석 잘 보냈는지요.

                                                               2000.09.14 11:31 

 계속되는 비 속에서 김이 오르는 갈색 커피를 앞에 두고 사뭇 느긋하게 편지를 씁니다.

 유천동에 며칠 있는 동안 '쥬라기 책방'에서 책을 빌려 보았습니다.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라는 책인데 혹시 보셨는지요?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보내드리고 싶어 여쭙는 것입니다.

 

 '현각'

 

 이라는 미국인 스님이 쓴 책인데,

 종교를 더욱 넓고 깊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한국인보다 더한 그의 한국 사랑에 한국인으로서의 저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해 줍니다.

 

 주변없는 제 말 보다는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백 번 나을 것입니다.

 

 전에 가르쳐 주신 주소로 보내드리면 되겠지요? (울산시 중부 약사동 707-5)  

 

 지금 시각이 열한 시인데 어쩌면 형님께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실지 모르겠군요.

 

 오랜만에,

 한 일주일여만에 컴퓨터를 열었더니 편지가 열 통이나 와 있었습니다.

 

 형님 편지와 yes24에서 온 것, 그리고 불법 CD 판매자들로부터의 수신거부도 안되는 메일들 등등...

 

 빗방울이 좀 더 굵어졌는지 유리창 너머 빗소리가 더 크게 들리네요.

 

 저는 비오는 날,

 흐린 날이 좋습니다.

 

 새롬이는 아주 질색을 하지요.

 

 흐리고 비오면 머리가 다 아프다나요?

 

 흐리거나 비가 오면 왠지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느낌입니다.

 

 한 며칠 비오다가 갑자기 해가 나오면 괜히 마음이 불안해지기까지 해요.

 

 저는 원래 컴퓨터를 자주 열지 않습니다.

 

 혹시 애들 숙제 도와줄 일이나,

 아니면 궁금해서 찾아볼 것이 있다거나,

 또 책 사러 서점에 가야 할 때 한 번씩 천리안에 접속해 보는 외에는 별로 쓸 일이 없더군요.

 

 한 마디로 컴퓨터의 생활화가 안되어 있다는 거겠죠.

 

 게다가 글쓰기를 즐기지도 못하니 늘 이렇게 형님을 서운하게 해 드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게으른 것 아시면서 먼저 편지하자 하셨으니 별 수 없죠, 형님께서 감수하실 수 밖엔.

 

 그래서 일주일 또는 한달 여만에 컴퓨터를 열어보면 때로는 이십통 넘게 메일이 와 있는 경우도 있어요.

 

 대부분이 쓸모없는 스팸메일이지만요.

 

 자주 편지 못 드려 죄송한 마음을 이렇게 쓸데없는 말로 얼버무리려는군요.

 

 다음은 'yes24'에서 온 '주간 도서 정보'에 인용되어 있던 글인데 너무 좋아서 저도 여기 옮겨 봅니다.

 

 '신비'

 

 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기진한 삶 속에도 신비는 있다.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 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에서,

 뒷바퀴 구동축 베어링에서,

 생의 신비는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서 흐르고 구른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김훈, 『자전거 여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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